그해 가을은, 하도 바닷가에 제 발자국이 수 놓였습니다. 바다 앞에 혼자는 오해받기 쉬워서 약속 있는 사람처럼 자주 시계를 봤어요. 다행히 바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발자국이 옅어지는 게 괜히 야속해지면 들이나 숲으로 갔어요. 울창 사이에 섞여 앉으려고요. 먼 들판에서 메밀꽃이 나풀거리고,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능선에 물결치는 억새를 따라 연민 같은 것이 일렁였지요. 눈부신 풍경을 마주칠 때 떠올릴 수 없는 얼굴만 남은 사람은 어떤 표정으로 살아야 할까요. 천진한 풍경 앞에서 지어야 할 표정을 잊었습니다.
슬퍼할 겨를 없이 그 사람을 인생에서 도려낸 후 창밖의 귤을 보며 긴 잠을 잤습니다. 손 떨리는 모욕을 누르고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서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외투처럼 몸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터져 나오는 울음 같은 것이었을까요. 정체되어 있던 슬픔이 몸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 몸을 지지하고 있던 구조물이 툭 쓰러진 느낌. 약을 먹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닌 잠을 자고 싶어서였지요. 낮은 너무 길고 잠들어 있는 순간만이 무엇보다 편안해서요. 우주적인 어둠을 자주 생각했어요. 마음이 부서져 버린 사람은 우주적인 어둠이 필요해요. 어둠 속에서 웅크리는 동안 자기를 덜 미워하면 좋겠어요.
모든 표정이 말처럼 설명적이면 어떨까요. 문득 스치는 표정은 쉽게 상하니까요. 사람의 표정을 말 대신 오래 응시하고 싶어요. 말에는 항상 실망이 묻어오기 때문입니다. 저의 슬픔에 대해 많은 사람과 이야기했어요. 정신과 전문의, 상담심리사, 변호사, 경찰, 엄마, 언니, 친구… 수많은 말을 하고 때로 하지 않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위로도 제 것이 아니었어요. 자주 돌아온 말은 '의지, 정신력, 지나간다'. 어쩌면 제 삶이 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유약한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사람의 말은 자기도 모르게 남을 헤집고, 깊이 찌르거나 가르치려 드니까 내버려 뒀어요. 말을 내버려 두는 것으로 말에 저항했습니다.
“너는 잃은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보내주신 문자를 보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모든 위로의 말이 제게서 썩어 버린 것은 슬픔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일까요. 슬픔으로 가득 찬 말속에는 저 하나밖에 없어서 저는 저를 잃었습니다.
그때, 밤이었어요. 동네 사람들 모두가 말을 잃은 듯한 밤. 저는 깜빡 잊은 약속이 생각난 사람처럼 바다가 보이는 언덕 아래로 달렸지요. 하도 해변은 우주를 바다에 푼 것처럼 짙은 어둠이었어요. 저는 약속된 일을 하듯이 천천히 바다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건 삶을 따르기보다 의미를 좇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삶이 떠올랐어요. 어떤 의미로든 사랑에 의존하는 삶이요. 때로는 의미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뒤흔든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사납게 요동치는 물살에 금방이라도 온몸이 부스러기가 될 것 같았어요. 거센 파도는 네 의지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나무랐어요. 마음도, 사랑도, 삶도 네 통제 밖의 일인 거라고. 여기서 죽어야 현실로 돌아가는 영화☾처럼 다른 차원을 향해 쉴 새 없이 헤엄쳤어요. 정신이 물처럼 빠져나간다고 느꼈을 때 눈을 떴고, 응급실 흰 복도를 맨발로 걸어 나왔습니다.
인생의 어떤 우발적인 사건들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를 관통해서 오지요. 그러니까 원하지 않았던 일을 어찌할 도리 없이 품고 살아야 하는 것. 그런 무력해진 마음으로 붙잡는 존재가 신인 것 같아요. 내가 말하지 않은 말도 듣고 있는 존재. 저는 수많은 신이 제게 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도 해변에서 나를 구해준 사람으로, 뭍으로 다시 돌려보낸 파도로, 갓 지은 밥을 차려주는 친구로, 곁을 만들어 준 요가원으로, 오후 하늘에 뜬 무지개로. 도시 사람에게 무지개는 신기루 같잖아요. 친구에게 무지개 보고 소원은 빌었냐고 물은 적 있어요. 친구는 말했습니다. 나는 소원이 없으니 대신 네 소원을 빌어주겠다고. 이 사람이 신이 아니면 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후로 몇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바다에 걸어 들어갔어요. 모든 발자국을 삼켜버리는 그 차갑고도 까만 물속으로. 거기에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고 싶던 것들을 축축하게 쏟아냈어요. 파도가 뭍으로 다시 밀쳐내면 벗어둔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젖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자꾸만 슬픔에 굴복하는 저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고통의 무의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여전히 저는 모르겠어요. 다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침묵하려 합니다. 스님이 하안거☾에 들어가신 동안 저는 돌탑을 쌓았어요. 돌 하나, 하나를 쌓으면서 애도하는 사람처럼 목구멍을 조인 채 산책을 했고요. 마지막 산책에선 계곡물에 들어가 돌멩이 하나를 주워 왔어요. 흐르는 물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돌. 그 돌에선 밤마다 침묵 소리가 났습니다.
기도는 대부분 그런 순간에 시작되는 것 같아요. 자꾸만 되돌아가는 어떤 순간들로부터. 하지 못했지만 사라지지 않는 말로부터.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사적인 슬픔으로부터. 제 기도는 늘 돌이고요. 어딘가 제가 모르는 곳에 다시 한번 고요한 밤이 오겠지요.☾
그해 가을은,
모두가 병든 사람 같았고 약해서 아프거나 약해서 잔인한 가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