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친구가 여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신제주에 가기로 한 날이다. 시골 마을의 저녁 8시는 도시 주택가의 새벽 1시와 비슷하다. 고양이도 다니지 않는 도로에서 나와 친구들은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불빛이 다가오는 걸 발견한 나는 “왔다!”ㅡ이 순간 오직 택시만 보였다ㅡ고 외치며 건널목을 건너다가 보도블록 턱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고 보면 몸과 마음의 호흡이 어긋날 때 곧잘 다쳤다. 포장을 뜯다 손을 베이고, 뜨거운 국물에 혀를 데이고, 계단을 내려가다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는데 최악은 손을 다치는 일이었다. 강박적으로 손 씻는 나 같은 사람에게 손에 생긴 상처는 고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이 닿을 때마다 상처는 펄떡펄떡 날뛰고 그런데도 손 씻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잘 닦인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잘 익은 귤을 반으로 쫙-가른 듯한 상쾌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마땅히 열 번 씻어야 할 손을 다섯번 만 씻을 수는 없다.
이번엔 양손이었다. 넘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은 탓에 손바닥 표면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살점이 패였다. 나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집안일을 하고 비닐장갑을 낀 채 샤워했다. 무거운 택배를 팔꿈치로 들어보려다 앞집 할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난한 일은 상처를 주시하면서 보살피는 일이었다. 검푸른 혈종이 옅어지고 부글부글 끓는 진물이 가라앉도록 아침, 저녁으로 소독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몸이 제 호흡을 되찾을 때까지.
고대 철학에서 호흡은 생명 ‧ 영혼 ‧ 창조의 원리와 신성이 인간에 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숨을 쉰다는 것은 한 개체의 생명 활동이면서 동시에 우주적 생명력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은 호흡에 의존하고 있다. 갓난아기는 숨을 시작하고, 노인은 서서히 숨을 멈춘다. 인도의 라마(영적인 스승) 차라카는 삶은 단지 호흡의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했다. 처음 요가원을 찾아갔을 때, 내가 바란 것도 호흡이었다. 하타 요가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로 본다고 했다. 그 우주적인 생명력을 회복해서 시원의 자기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이 요가이다. 아사나(자세)와 프라나(호흡)을 통해서. 나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무의식적 호흡이 아닌 의식적인 호흡을 배우고 싶었다. 다시 산다는 것은, 의식적인 힘을 길러야 하는 일이므로. 그 힘은 물체 사이에서 무언가를 변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별처럼 작은 입자들이 모여 존재를 보호하고 일으키는 우주적인 힘이었다.
간판도 없는 해변의 요가원. 고통스럽길 결심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서로의 고통을 지켜봐 줄 사람들이. 사람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선생님이 내려주는 보이차를 마셨다. 찻잔을 비우면 새로운 차를 채워주어서 줄곧 입술과 배가 따뜻했다. 조명과 찻상 말고 아무것도 없는 요가원에는 차를 마시고 숨을 내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고요를 곱씹었다. 고요한 마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발달처럼 차올랐다. 기초적인 아사나에도 오래 굳은 내 근육들은 강한 통증을 느꼈다. 나는 그만 포기하고 사바 아사나(송장 자세)를 하거나 화장실에 가는 척 집에 가 버리고 싶기도 했다. 거꾸로 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매트로 고꾸라지는 내 등을 톡, 하고 치며 선생님이 말했다.
“조금 고통스러워도 해야 해요. 고통을 점처럼 바라보고 고통 속에서 자기 나름의 편한 호흡을 찾아보세요.”
호흡은 내가 인식하는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담고 있는 듯했다. 몸의 유연성과는 상관없이 어떤 자세에서는 편안히 호흡했고, 어떤 자세에서는 비명이 섞여 나왔다. 사실 숨을 마시고 내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고통을 하나의 점처럼 응시하면서 호흡에 기울였을 때 통증은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각자의 매트 위에서 호흡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목구멍을 조이고 긴 숨을 내쉬는 우짜이 호흡(ujjayi pranayama, 승리 호흡)을 할 땐 쏴ㅡ하는 파도 소리가 났다.
물 위에서 참았던 숨을 내쉬는 해녀에게선 숨비소리가 난다. 아기새가 우는 것 같기도 돌고래가 식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한 소리. 아무런 장치도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해야 하는 물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운 호흡일 것이다. 나는 고통의 수면 위로 참았던 숨을 내쉬는 사람에게도 슬픈 소리만 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연한 바람에도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난 저녁 넘어졌던 상처가 씻긴 듯 매끄러운 피부. 그러나 이 손은 넘어지기 이전의 손과 같은 손은 아닐 것이다. 내 몸은 그날의 상처를 기억한다. 고통의 자리와 염증의 흔적을 기억한다. 상처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손톱이 움푹 파이도록 긁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도 상처가 소거된 세상을 빈 적은 없었다. 데이고 부딪치는 상처는 삶에서 늘 들리는 소리이고 질서를 따르는 소리였으므로. 숨비소리처럼.
나는 내 호흡을 되찾았나?
이 질문은 여전히 우주만큼 멀게 느껴진다. 본래의 내가 우주적 생명력을 가졌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위대한 삶을 좇기보다 매일 저녁 매트 위에서 뒹굴었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차를 나눠 마시고, 어제보다 조금 더 긴 숨을 쉬고,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말을 빌었다.
멀리서 가까이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면 좋겠다고.
그 소리에 우는 듯 춤을 추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