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엔 연두가 자라고 복숭아는 선 분홍이 된다. 쨍한 햇빛이 커튼의 빈틈으로 들어오면 이웃 동네 샨티의 문자가 나를 깨운다.
“바다 가자.”
습기를 먹어 쭈글쭈글한 벽을 향해 제습기를 틀어놓고 와인잔과 사롱, 선글라스를 챙긴다. 수영복 위에 쉬폰 원피스를 입고 차에서 내리면 샨티가 모래에서 뱅글뱅글 돌며 파라솔을 펼치고 있다. 낮에는 수면 위를 동동 떠다니면서 물보라에 홍소를 터트리고,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거리다가 드러누워서 책을 읽는다. 바다에서 돌, 돌에서 모래, 모래에서 바람, 바람이 피부로, 피부에서 여름이 느껴졌다. 희고 무른 충동으로 가득 찬 나날들. 나는 여름의 충동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삶을 낭비하고 싶었다.
책상 위 일력(日曆)이 여름방학 숙제처럼 밀려있다. 밀린 날짜를 전단지처럼 떼어내다 보니 22일이 되었다. 22일의 그림은 손바닥 위에 놓인 복숭아. 아가의 주먹처럼 연한 그림을 만지작거리다 어젯밤 친구와의 통화를 떠올린다.
“네가 좋아하는 복숭아 철이야. 장마가 오기 전에 제일 좋은 것으로 보낼게.”
자기 전 냉장고에 한 알씩 넣었다가 다음 날 아침 신나게 베어먹는 내 모습을 기억한다고 했다. 나는 복숭아를 좋아하지만 달고 촉촉한 제철 과일 대부분을 좋아한다. 친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복숭아 얘기를 하는 것은 ‘요즘은 좀 어때?’란 안부겠지. 이렇게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복숭아나무가 있다. 햇볕에 잎이 무성해질수록 사람을 사랑하고 바람에 마를수록 자신을 미워하면서 주변을 사랑의 냄새로 물들이는 사람들. 하지만 복숭아는 쉽게 상처가 생기고 벌레가 모여들어 저장이 힘들다. 복숭아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액자들을 바라본다. 김환기의 영원의 노래(1956)ㅡ원화라면 얼마나 좋을까!ㅡ 옆에 복숭아 그림을 나란히 오려붙였다.
복숭아가 도착했는데도,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게 사람인지 사물인지 날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기다리는 동안 오롯이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가까이서 오고 있을 미래를 상상하고, 기대하고, 두려워하기. 누군가가 함께 있더라도 혼자인 게 분명해지는 시간이다. 나는 여러 개의 복숭아 중에서 말랑해진 복숭아를 베어 물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다림은 마침내 둘이 되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일까.
원이 섬으로 오겠다고 했다. 날짜를 말했고, 도착시간을 말했고, 보고 싶다고 말했다. 보고 싶다는 말은 우리를 대상으로 무작정 이끄는 힘이 있다. 그와 나 사이에 몰랐던 감정들이 휘몰아쳤고, 같은 미래를 상상하는 두 마음의 온도가 여름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사랑하는 새를 찾아 세상 끝으로 떠나는 곰 이야기(코티에 다비드,『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2018)를 서가에서 꺼내 포장했다. 그리고는 꽃집에 전화해 파랑색ㅡ원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했다ㅡ 꽃다발을 주문하고, 화분에 물을 줬다. 냉장고에 신선한 과일과 치즈를 채워 넣은 뒤 세차도 했다. 첫인사는 어서 오라고 하는 게 좋을까? 파랑 꽃을 보고 싱긋 웃어줄까? 걷다가 슬쩍 팔을 끼워 넣으면 번져나갈 표정의 온기는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으로 쏟아지는 여름을 바라봤다. 거리에 야자수 잎이 짙어지고 하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진 걸 알아차린다.
낯섬과 기대를 머금은 연한 갈색 눈동자와 어깨에 닿는ㅡ소아암 환자를 위해 기른다고 했다ㅡ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더위에 녹은 듯한 목소리, 물건을 벗어둘 땐 가지런히 두고, 매운 걸 못 먹으면서도 열심히 먹고, 그림을 그릴 때는 재즈를 듣고, 바빠서 시를 읽지 못하는 게 슬프고, “말도 안 돼”란 감탄사를 쓰는 남자. 정적인 표정과는 달리 치열하고 강렬한 그림을 그리던, 원. 초 여름밤의 선선하고 들뜬 공기는 그의 어깨와 어울렸다. 나는 그 어깨에 기대서 파도가 연주하는 Waltz for Debby(Bill Evans, 1956)를 들었다. 어깨 위 수영복 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을 밤. 여름밤들.
빗물이 발등을 찰박찰박 친다. 나는 내리는 비를 맞기로 작정한 나무처럼 신호등 앞에 서 있다. 빗물 위를 소금쟁이처럼 미끄러져 지나가는 자동차들. 비와 나 사이에 안전거리를 알 수 있다면 좋겠다. 곧 멈출 예정이라면 깨끗한 신발로 갈아신고, 한사코 계속될 예정이라면 창이 넓은 실내로 들어갈 텐데. 나는 매번 비를 맞고 나서
야 후회하면서 우산을 마련한다. 원과 만나기로 했던 길이 엇갈렸고, 우리는 다 젖은 모습으로 만날 것이다. 그가 예쁘다고 했던 라벤더색 바지가 거뭇해지는 걸 바라보며 길을 건넜다.
원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이어폰을 꽂은 채 시집을 넘기고 있다.
“읽어줘.”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TV가 꺼진 방안에 시가 울린다.
: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는 이국에 다녀온 사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애틋해요?”
물음표가 향하는 곳이 우리 사이인지 덮인 사랑인지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되었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름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여름의 모습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실내에서 실내로 전전하는 여름은 아닐 것이어서 여름을 좋아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깨지 않았어요? 오늘 기분 어때요? 밥 먹었어요? 잘자, 내일 만나자. 이런 걸 모으면 사랑이지 특별할 게 있나요.”
하루의 부분 부분에 서로가 있다면 그건 푸른색이니까. 호크니(David Hockney)의 여름처럼. 우리가 두 손을 잡고 ‘더 크게 첨벙’(A Bigger Splash, 1967) 뛰어들면 모든 것이 푸르게 보일 것도 같은 마음. 그런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에서 겹겹이 쌓이면 여름에 나눴던 우리의 기억은 애틋해질 것이다.
"성숙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등 돌린 목소리가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 꿰매놓은 어딘가가 두둑 뜯어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는 내가 말한 ‘일상적인 사랑’과 원이 말하는 ‘일상에 더해진 사랑’의 차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의 방식이 성숙과 미숙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랑은 언제나 성숙과 미숙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익숙해질 수 없는 처음과 완전해질 수 없는 감정이 뒤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쌀쌀한 듯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계를 향해 고함치듯 쏟아지는 빗소리. 당신의 굽은 등과 나의 움츠린 어깨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상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자기만을 끌어안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무성한 초록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춤을 췄다. 공항 가는 길에 들린 베이커리에는 캐리어를 끌고 온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과 나는 모자와 슬리퍼를 신은 채 함께 빵을 골랐다.
“시집 한번 읽어봐도 돼?”
테이블에 올려둔 내 가방에서 튀어나온 시집을 바라보며 원이 물었다.
“그럼, 읽어요. 나는 이 시가 정말 좋았어.”
:
때로는
눈에 띄는 순정이 더 필요한거라
햇볕에 닿기도 전에 당신은 뜨겁다고 말한다 잡은 손은 여전히 차갑게 떨고 있다 그보다 내겐 열리다 마는 당신의 입술과 힐의 무게와 겉옷의 두께가 중요하다 벽화가 끊어진 곳에서 펍을 지나치면
당신은 춥지 않냐고 묻고 나는 춥지 않다고 말한다 불과 몇 걸음 차이로 지명이 바뀌고 문득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당신의 목소리만 듣고 있으면 당신이 아닌 사람을 떠올리고 만다
춥지 않다는 게 따뜻하단 말은 아니었는데☾
꽂아둔 책갈피를 거두자 글자를 따라 내려가던 원의 눈동자가 적막해졌다.
“무슨 뜻이야?”
“음, 나는 그냥… 쌀쌀한데 명치가 뜨거웠어.”
“아니.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응?”
“당신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인 줄 알았어…”
그때 나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마음의 말은 눈으로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 있지만 ‘눈에 띄는 순정이 더 필요한 거’겠지. 여름 볕에 무성해지기도 전에 당신은 뜨겁다고 말하고 잡힌 내 손목은 여전히 차갑게 떨고 있다.
나는 식탁 위에 두고 온 복숭아 한 알을 생각했다. 혼자서 무르다가 그만 여기저기 반점이 생기고 있을, 여름벌레들이 달라붙어도 제 속만 탓하고 있을 복숭아를. 이제 여름은 물기를 잃을 것이다. 나는 휴가 냄새가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
배웅하면서, 원은 흩어지는 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내 몸을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나는 가만히 그의 두 눈을 올려다봤다. 테두리 없는 연한 갈색 눈동자 그리고 붉어지는 눈시울을… 오래 기억해야 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