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집이 진동하고 있다. 섬의 바람은 수평으로 분다. 어긋난 문틈으로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낡은 방문이 요동친다. 다급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아서 나는 기도하듯 향을 피운다. 사람의 소리는 없고 휘어지는 나무, 피신하는 고양이, 세간살이 쓰러지는 소리로 가득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집안에 살아있지만 바람 때문에 영혼이 꺼져버려서 빈집이 된 건 아닐까. 집은 혼자 밤을 견디고 있다.
서재에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을 꺼냈다. 섬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낮은 너무 짧고 밤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아서 책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물을 끓이고 해괴(解塊)한 찻잎을 개완에 넣는다.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책장을 넘긴다. 파란 배경에 붉은 얼굴을 한 사람이 거울을 들고 자신을 보고 있다.
우리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같아. 마음의 집에는 문이 있어. 어떤 사람은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어떤 사람은 활짝 열어 두지. 문을 아예 닫고 사는 사람도 있단다.☾
파란 페이지가 ‘마음의 집’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엄마가 그리울 때 엄마라고 말하면 울고 싶어지듯이. 그림 검사에서 집은 그린 사람의 숨겨진 정서와 관련된 태도를 알 수 있다. 지붕은 정신생활, 창문은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문은 대인관계 태도, 수풀은 정서적 보호 욕구를 의미한다. 내가 그린 집은 정교하고 뾰족한 지붕, 높은 창문 세 개, 문이 없고 나무 수풀에 둘러싸여 있다. 타인이 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호하는 집.
사실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내가 사는 동네도 아니었고, 나를 설명하는 명함도 아니었고, 옛날얘기를 안주 삼아 위스키를 나눠마시는 친구도 아니었다. 수많은 마음이 있었지만 사람으로부터 감추고 뭉개거나 사람에게서 반사되었다. 정말이지,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삶의 중요한 가치는 사랑이라는 허영을 가진 내 마음은 가난했다.
바람이 불고, 다시 돌집이 진동하자 문득 집 안의 모든 것이 검게 느껴졌다. 향이 꺼지고 전등은 빛을 잃은 것 같았다.
지난 1월의 겨울에도 거리의 모든 것이 검게 느껴졌다. 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달린 볼펜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당 경찰관이 힐끗 펜을 보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게 집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전하게 지낼 곳이 있느냐고. 거의 평생을 누구와 함께 살면서도 집이 안전한 곳이라고 느껴본 적 없었다. 위험이나 사고로부터 걱정 없는 것이 안전인데 사실 개인의 모든 재앙은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돌연한 이사나 갈등, 차별, 죽음처럼 크고 작은 불행들이. 특별히 내가 불행했다는 말이 아니다. 집은 머무는 눈길 같은 공간이라는 말.
이어서 경찰은 내게 그 사람을 처벌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벌을 주겠냐는 질문은 이상하다. 피해자가 고통을 참는다면 가해는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는 말 같다. 가해는 어느 ‘정도’일 때 미비한 것이고 중대한 것일까. 다친 만큼? 속은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만큼? 그가 내 곁에 있는 동안 지붕과 벽이 생기고 안전한 집은 이런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깊은 불안은 그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나 그는 나의 가해자였다. 집은, 이제 해방된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고 문을 열었다.
찻잔에 남은 찌꺼기를 버리고 새로 물을 끓인다. 책장을 넘기자 붉은 손바닥이 보인다. 오른쪽 손바닥엔 나비 한 마리.
그런데, 마음의 집은 가끔 주인이 바뀌곤 한단다. 어떤 날은 불안이, 어떤 날은 초조가, 어떤 날은 걱정이 내 마음의 집을 다스리지. 또 어떤 날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의 집 주인이 되기도 한단다.
마음의 집은 주인이 바뀔 때 문 없는 집이 되는 게 아닌지. 어떤 주인은 그만 내보내고 싶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까. 아니, 나갈 수 없으니까. 나는 방 안의 그림자로 손 나비를 만들었다. 그 사람과 내 집에 있던 마음들, 그 많은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집은 돌, 흙, 나무, 철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마음의 집은 영혼을 닮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사랑, 약속, 미움, 연대, 기도의 편린들로 만들어진 공간. 그래서 우리가 삶의 어떤 지점에서 멈추고 싶어질 때ㅡ초라해서 숨고 싶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를 때, 아프고 보호받고 싶을 때ㅡ회복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바람이 수평으로 부는 밤에도 마음의 집에 불이 밝혀있다면 우리는 계속 걸을 수 있다. 검은 골목을 비추는 온기로 몸을 데우면서. 그러니 집이 품은, 집을 떠올리면 붉어지는 눈가 같은 것은 어떻게 할까.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섰지만, 집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집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