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블라인드에는 식물의 모습을 한 플라스틱이 매달려 있다. 머리와 어깨에 수북한 먼지를 쓰고, 싱싱하고 건조한 기운을 내뿜으며 “난 괜찮아. 이만하길 어디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시드는 마음이 된다.
이오난사, 스투키, 백도선, 뱅갈 고무나무… 집안에 들인 식물은 극소량의 관심과 애정만으로도 산다고 했다. 화원 사장님이 눈감고도 키운다던 그들을 나는 자주 말리거나 썩혔다. 비워낸 화분을 다시 화원에 들고 가면 순식간에 같은 식물이 심겼으니까. 같다고 해서 똑같다는 말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매번 비슷한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다.
정신건강전문의 요즘 가장 강렬하게 휩싸이는 감정이 있나요?
나 자책이요. 나 하나만 참고 넘어갔으면 됐나?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건 없나? 내 성격에 문제가 있지는 않나? 이렇게 나약하게 굴면 안 되는데. 혼자 감당할 수 있어야해. 이렇게.
정신건강전문의 슬플 때 흔히 자책하게 돼요. 그런데 죄책감은 잘못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거든요. 우리 사회가 슬픔에 지나치게 엄격한데요. 마음이 아플 때 몸과 뇌가 얼마나 병드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요.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죄책감을 껴안고 자신을 공격하게 되거든요. 상대방은 이미 나의 일부로 내면화돼 있으니까 증오가 나를 향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의 고통을 인정받지 못할 때 고통은 악화되고 회복은 더 멀고 힘들어져요.
나 제 삶을 부정당한 기분이에요. 먹기도 싫고 잘 수도 없고 밤마다 뛰쳐나가 걸어요. 걷는 걸 멈출 수가 없어요. 갈등이 있을 때마다 제 일기는 자기비판뿐이었거든요. 결론은 항상 ‘내가 유연하지 못해서’였어요. 가족들도 그 사람도 저도, 저에게 그렇게 말했죠. 그런데… 이게 저잖아요.
정신건강전문의 맞아요. 사랑을 상실하면 마음에 금방 자기 비하, 죄책감이 자리 잡아요. 내가 좀 더 참지 못해서, 내가 잘못한 것도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요. 납득하기 어려운 상실 앞에서 우리는 해결책에 매달리게 되거든요. 상대를 용서하거나 상대에게 답을 듣는 것 보다,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게 더 쉬우니까요. 잘못하고 있는 거 없어요. 우리는 상처받은 거예요. 지금은 산산이 조각난 마음의 파편들을 다시 붙이는 시간인 거죠.
병원 앞에서 매연을 견디고 있는 은행나무를 올려다봤다. 그 옆에 은행나무, 그 옆에, 옆에 은행나무… 늘어선 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수림의 회생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거짓말로 멸망한 체르노빌을 초록으로 뒤덮은 식물의 힘이 필요하다고.
나는 나를 얼마만큼 보살펴야 시들거나 썩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