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많이 쓰는 색이 있을거라고 했다. 어쩌면 이미 새로 샀거나 다른 제품의 같은 색을 샀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오일파스텔 케이스를 열어본다. 96색 중에 껍질이 반쯤 벗겨지고 뭉뚝한 [001 White]. 구름과 파도만 그리다가 다 닳아버렸다. 나는 하늘로 흩어지고 싶은 걸까 바다로 쏟아지고 싶을 걸까. 그게 뭐든 흰 것이 되려는 게 분명했다. 상실의 기분을 색으로 고른다면 흰색이겠지. 나는 상담 선생님에게 어제 본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이야기했다.
새하얀 눈과 얼음이 끝 없이 펼쳐진 그린란드. 가장자리가 바다와 맞닿은 곳에서 빙하가 무너지고 있었다. 빙하는 굉음을 내며 터진 몸을 수면으로 토해냈는데, 비행기가 허공에서 추락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잔해와 비명으로 순식간에 바다가 뒤덮히고 물기둥이 솟구쳤다. 입을 쩍 벌린 해일이 그 모든 걸 집어삼키면서 심해로 가라앉았다. 그건 뭐랄까… 사랑이 무너지는 풍경 같았다. 비오는 날 거실에 울려퍼지는 노래, 같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옷, 특별한 날에 꺼내 마시는 위스키, 계절이 시작되면 찾아가는 장소들… 당신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풍경.
나 모든 게 새하얘요. 새하얀 세계에서 내가 유령처럼 떠도는 것 같아요.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과 나는 다른 인종 같아요. 새 직장에 출근하고, 그림을 배우고, 옷과 신발을 사 모으고,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 떠들어 보지만 밤이면 그날로 돌아가요. 집안의 뒤엉킨 냄새와 소음, 맨발에 닿은 계단의 냉기, 온몸이 멈출 수 없이 떨리고 밤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날이요. 그날이 오늘과 붙어버린 것 같기도 해요. 절망이 반복해서 재생되는 거예요.
상담심리사 지금 느끼는 감정은 정당한 반응이에요. 상실을 겪은 사람의 시계는 멈춘 것 같죠. 우리의 심리적 문제들은 상실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생겨요.
나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다 그 사람 탓을 하면 쉽다는 거예요. 나쁜 행동을 했으니까 나쁜 놈이라고. 그럼 벌을 받아 마땅하니까 어떤 복수를 해도 상관없어지는 거죠. 악을 대하듯이요. 모르겠어요. 그러면… 이 모든 진창이 조금 덜 진창이 되나요?
상담심리사 사랑은 우리의 정체성을 뒤흔들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본질과 마음, 의식을 흔들죠. 그래서 사랑하지만 두렵고 미운 대상이기도 하는 거예요. 이런 상반된 감정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애도가 시작돼요. 지금은 애도하는 시기인 거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테이블에 놓아둔 얼음 컵을 들어 올렸다. 냉기를 간직한 얼음은 머물렀던 자리에 축축한 원을 그렸다. 고개를 돌리다가 책장에 꽂힌 책 한 권과 눈이 마주쳤다. 프로이트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를 잃었는지 알고 있지만, 자신 안에서 무엇을 잃었는지는 모르☾고 있네요.”
컵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원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