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서 잠이 깼을 때, TV에는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아직 꿈속인 것 같았다. 나는 새벽 3시,라고 중얼거리면서 문자를 보내려다가 목구멍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 술을 마시는 거야? 택시는 잡을 수 있는 정도인가? 전화는 왜 안받아.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하나?’
화면에선 왕페이가 양조위의 집에 몰래 숨어들었다. 낡은 칫솔을 갈고, 수족관에 금붕어를 풀고, 새 옷을 사다 옷장에 걸고, 옛 애인의 머리카락이 남은 침대 시트를 바꾸기도 하며 양조위의 집을 돌본다.
사랑은 돌보는 만큼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집을 돌볼수록 사랑에 기여하는 유의미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신선한 주스가 식탁에 준비되어 있다면, 깨끗하게 다린 정장이 걸려 있다면, 보송한 수건과 가운이 켜켜이 접혀있다면 집은 반듯한 공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까다롭지만 유세하지 않는 우리의 공간. 그곳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고통과 인내, 몇몇 농담과 화해를 섞으며 사랑이 확장되어 갈 거라고 믿었다.
왕페이가 양조위의 집을 무사히 돌보기를 바라면서 나는 견딜 수 없이 잔인한 표정을 담은 문자를 몇 번 더 그에게 보냈다.
같은 상황으로 지나치게 싸웠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를 돌보고 있다. 비 오는 날 어떤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지, 쉬는 날 낚시터에는 왜 찾아가는지, 겨울 산을 오르면서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그런 것들이 우리 사이를 완전하게 갈라놓지 못했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서로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결핍을 공유하는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마신 물컵을 설거지하고 옷가지와 양말을 빨래통에 넣고서 막 화장실에서 나온 사람처럼 관대한 얼굴을 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는 안도감, 영화를 되감으면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정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차고의 문단속만 마치면 완벽했다. 어두운 차고에는 주차중 녹화를 알리는 블랙박스의 파란불이 빛나고 있었다.
其实了解一个人并不代表什么,人是会变的。今天他喜欢凤梨,明天他可以喜欢别的。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한다 해도 그게 다는 아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니까.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거실에는 임청하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나는 부엌에서 식칼을 꺼내 들고, 코골이가 진동하는 방문을 열었다. 성글게 닫힌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그의 구부러진 등을 비췄다. 음식점의 눅진한 기름 냄새와 술 냄새, 피부에 찌든 담배 냄새가 뒤섞여 뱃속이 울렁거렸다.
사랑이 삶의 의미라는 것. 그 말은 사람이ㅡ배우자나 아이, 가족, 연인 같은ㅡ 삶의 의미라는 뜻이기도 하다. 삶의 의미는 대단히 고유한 문제다. 그런데도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면 어떤 고유성을 충족해서일까. 지금 내가 선호하는 취향일까? 함께 보낸 무수한 시간일까? 기다림을 기다린 인내일까? 나는 그를 진실로 사랑했을까 사랑을 길들인 시간만큼 사랑했을까.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잘 변하니까.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계단을 거의 뒤덮은 어둠을 밟고 옥상으로 향했다.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한숨으로 흩어졌다. 공중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부유할까. 그중에 허무가 내 몸에 달라붙는 것을 느끼면서 난간 위로 올라섰다. 눈을 감고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찾아가 총으로 쏴버린 후 떠나는 임청하의 뒷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