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느려지는 눈꺼풀을 하고 조명을 켠다. 노란빛을 태양처럼 쬐다가 동그랗게 웅크린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는다. 따듯한 보리차를 홀짝거리면서 천천히 오늘의 영화를 재생한다.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공들여 헤어지는 두 사람 그 ‘난처한 순간’☾을 바라본다. 국수 가게 골목을 지나는 장만옥과 소설을 쓰며 담배를 피우는 양조위에게 같은 배경음악이 흐르면, 나는 비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차우(양조위) : “옛날 사람들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낸 다음 거기다 비밀을 털어놓고 진흙으로 막았대.
그럼, 비밀은 영원히 그 나무에 갇히고 아무도 모르는 거야.”☾
창가엔 버드나무 그림자가 흔들리고 흔들릴 때마다 나무에 구멍을 내는 상상을 했다. 견뎌야 했던 모욕, 가장 찬란했던 시절, 자꾸만 되돌아오는 불안… 사랑했던 너무나 사랑했던 마음. 그러나 나는 이 슬픔을 구멍에 가두는 대신 풀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아마도 슬픔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면서 어딘가 아름다운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아름다움은해답이아니라비밀에있으니까.
『어딘가 아름다운 기분』
19화
끝
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왕가위, 화양연화, 2000. 왕가위는 여러 영화에서 내레이션과 독백을 사용한다. 내레이션은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 글에 일부 인용된 내레이션의 전문은 이렇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채 남자에게 나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 후 떠난다.”
☾ 왕가위가 소병림과 식사하는 장면에서의 대사.
공유하기
가장 긴 밤 Vol. 1 구독 신청을 환영합니다.를 구독하고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이메일로 글을 구독하는 서비스입니다. 평일 밤마다 한 편씩, 한 달 동안 글을 받아보세요.
이전 뉴스레터
《가장 긴 밤 Vol.1 》18화_ 그저 기울이려 하는 것이라고
2023. 11. 1.
다음 뉴스레터
《가장 긴 밤 Vol.1 》특집_하지 못한 이야기
2023. 11. 3.
가장 긴 밤 Vol. 1 구독 신청을 환영합니다.
이메일로 글을 구독하는 서비스입니다. 평일 밤마다 한 편씩, 한 달 동안 글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