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마다 알고 있지만 새삼스럽고 몰라서 기쁜 단어들이 고개를 내민다. 나는 그런 단어들을 모은다. 1,042개의 단어가 사전 앱에 저장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기울이다’를 고르겠다. 사전을 찾아보면 ‘기울이다: 비스듬하게 한쪽을 낮추거나 삐뚤게 한다, 정성이나 노력 따위를 한곳으로 모은다.’라는 뜻이다. 사물의 모양이든 사람의 정신이든 한군데로 모인다는 점에서 나는 모닥불을 피우는 사람을 떠올린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불꽃을 피워올리는 사람. 우리는 그 불꽃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다가 점점 서로를 향해 어깨가ㅡ그만 마음도ㅡ기울어질 것만 같다. 또 ‘기울이다’를 소리 내 말하면 ‘울’에서 목구멍이 울리면서 말의 뉘앙스가 따듯해지고 입술의 모양도 귀여워진다. 모름지기 귀여운 게 전부 아닌지.
단어를 모으는 일만큼이나 습관적인 건 차(茶)다. 저녁이 가지 않은 새벽이 오지 않은 밤. 색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에 나는 성수(聖水)처럼 거른 물을 끓인다. 향을 피우고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향기가 번지면 찻잎을 우린다. 적당히 우러나길 기다리면서 음악을 트는 시간은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같다. 차를 마시면서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지휘에 맞춰 그림책을 보고,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의 피아노에 시 몇 편, 쳇 베이커(Chet Baker)의 블루를 지나 김오키의 색소폰이 흐를 때까지 산문과 소설을 읽는다. 영화와 그림책, 바흐와 시, 천사의 목소리와 산문, 드레드 헤어와 소설 그 사이를 밑줄 그어가며 세상에 없는 별자리를 상상하기도 한다. 찻물이 묽어지고 다기가 식어갈 즘엔 나를 둘러싼 문장들로 시와 글을 짓는다. 마지막까지 엔딩 크레딧을 지키는 사람처럼.
코스모스 핀 창가에선 백차를 마시고, 나른한 오후엔 보이 생차를, 당근케이크와는 홍차, 구름 낀 날엔 핸드드립을 마신다. 차가 좋은 이유에 대해서는 종일 재잘댈 수도 있지만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을 거르고, 적당한 온도로 끓이고, 찻잎을 세차(洗茶)하고, 다기를 차례로 데우고, 차가 우러나는 때를 기다렸다가 마시기 좋게 거르고, 따르고, 점점 연해져서 제 몫을 다할 때까지… 다시 또다시. 기울이지 않은 차는 묽고 떫거나 식어버린다. 그 수고롭고도 겸허한 행위를 묵묵히 할 때 맑은 차 한 잔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의 폐허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는 일처럼 여겨진다. 절망과 수치심을 정제하고, 지지와 연대로 영혼을 데우고, 회복할 수 있는 것과 없는 사실을 거르고, 일상의 경계선 안으로 점점 기울이는 일. 그 지난한 일을 반복하다 보면 문득 깨달아졌다.
‘비우려고 하는(마시는) 거구나.’
어떤 밤에는 ‘슬픔’이란 단어가 차 맛에 뒤섞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찻잔을 비워내고, 새로 물을 끓이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하얗고 얇은 개완을 꺼내 3월 첫순 보이차를 넣는다. 무구하고 연한 풀 향이 난다. 찻잔을 손끝으로 잡고 넘길 때 호로록- 소리가 나면 나는 마시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의 기도를 신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듣듯이. 그러는 동안 밤은 옅어지고, 슬픔은 내가 잊지 않고 있는 사랑의 또 다른 뜻 같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세상이 지옥으로 떨어질지라도, 나는 언제나 차를 마시겠다.’라고 썼다. 누군가 내게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기울이려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서로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려고.
그리하여 슬픔과 사랑 속에 있던 것들,
어떤 밤에 살아서 찰랑이는 것들을 함께 마시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