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의 이름이 마음에 드니?”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하리보 젤리를 먹는 희에게 물었다. TV에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해 자신의 이름값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군 전투비행단 박격포씨, 산부인과 간호사 임신복씨, 건축과 교수 김노동씨…
“내 이름? 아직까진 괜찮아. 고등학생 때 시험지에 이름을 쓰는데 어색하게 느껴진 적이 있어. 엄마랑 점집에 찾아갔는데 무당이 말하길, 내 이름이 별로라서 내 인생이 별로라는 거야.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 내 인생이 딱히 별로는 아니었거든. 그래서 아직까진 이 이름이야.”
희는 라즈베리 곰을 씹으면서 말했다. 삼십 대가 넘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사람마다 타고난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매일 길고양이 밥을 챙기는 무뚝뚝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뒷말을 쌓아두면서 두부처럼 말갛게 보이는 얼굴도 있었다. 희의 타고 난 얼굴은 이랬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다에 걸어 들어갔는지 얘기했을 때, 별다른 호응이 없다가 눈물을 후드득 흘리는 얼굴. 티슈를 내밀면 꼼꼼히 눈가를 닦은 후 다시 뚜한 얼굴로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나는 희가 별로는 아니었다고 했던 수험생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자기 앞의 일을 묵묵히 다하고 서슴없이 남에게 제 자리를 내어 주었겠지. 그러니까 운명은 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개발이 한창인 위성도시에 있었다. 방학이 끝나면 한 반에 두, 세 명씩 전학생이 생겼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정글짐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분위기였다. 어느 날, 여럿이 모이면 꼭 한 명씩 있는 아이ㅡ사소한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ㅡ가 이런 소식을 전해왔다. 1반 변씨, 3반 김씨A, 5반 김씨B, 6반 정씨의 성을 가진 내 이름들이 있다고. 그중 변씨와 나는 같은 반이었으므로 일 년 내내 조선시대 여인처럼 이름이 아닌 성(成)으로 불렸다. 같은 이름끼리 심부름 다녀오라는 선생님의 농담도 별로였지만 무엇보다 남자애들에게 ‘너도 변이랑 이름이 같으니까 똥이냐?’란 놀림을 받는 건 더 별로였다.
“좋은 이름이라서 널리 쓰는 거야.”
엄마는 이렇게 위로했지만 만약 내가 한 살로 돌아간다면, 내 이름을 지어준 스님에게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다.
“제 이름에 박힌 ‘돌(玟)’을 빼주셔야 합니다. 살다가 자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만 같으니까요.”
영원하고 쓸모없는, 신성하고 흔한, 순수하고 장식적인, 예리하고 둔한,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돌 같은 것이 굴러다녔다.
이름에 운명적, 주술적 능력이 깃들어 있다는 시각은 오래 이어져 온 일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고 믿었다. 희곡 페르사 속 ‘이름과 운명은 같은 가치를 가진다'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름의 신비성을 믿은 사람들에 의해 격언처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사물마다 '진짜 이름’이 있다고 여겼다. 신이 천사에게는 가르쳐주지 않고 인간에게만 가르쳐 주었다고. 그렇다면 이름의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내려진 이름이 중요할까. 내 안에 있는 진짜 이름이 중요할까. 만약 희가 태희, 옥희로 이름을 바꿨더라면 젤리를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을까? 만약 스님이 지현, 지구라고 나를 불렀다면 나의 ‘사랑’과 ‘슬픔’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지 않았을까?
이름은 나를 내가 아닌 사람과 구별해서 부르는 말이다. 화가 김환기는 수화(樹話, 나무와 이야기 하다)라는 호가 있다. 노동 해방을 꿈꾸던 박기평씨의 필명은 박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인생의 굴곡마다 성과 이름을 네 번 바꾸었다. 사람들은 철학이나 사상, 좋아하는 이미지, 가명 뒤에 숨고 싶은 마음마저 압축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나는 섬에서 만났다. 구름, 보리, 월(月), 샨티(शांति), 단다(ད་ལྟ་)… 그들은 자기 자신을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소개했고, 부르는 사람은 그게 진짜 이름인지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 이름이 진정한 자신과 가까운지 되고 싶은 모습에 가까운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할 것이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름에서 진짜 ‘나’가 솟구쳐 나오는 것뿐이었다.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이름이 정해진 불행과 처지를 달라지게 할 수 있는지 경험한 적은 없다. 운명이 등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짐작한 적도. 그러나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느꼈을 때, 나는 비로소 삶이 말을 걸어 온다고 느꼈다. 용서하라고, 사랑하라고, 기지개를 켜라고, 숨을 크게 마시고 내쉬라고. 한때 ‘나’였으나 내 안에서 사라져가는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너는 높고 아름다운 돌이야.”
내 운명의 작은 신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