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과 나는 한 뼘쯤 떨어져서 방파제를 따라 걸었다. 물고기를 유인하는 집어등(集魚燈)의 빛이 검은 수면 위로 빛났다. 가까운 빛은 오징어를 거두고, 먼 빛은 갈치 그물을 내릴 것이다. 휴가객들은 그 반짝임을 다른 별에 사는 종족처럼 구경했다. 낚시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생선회를 먹기도 했다. 그때 나는 수면에 반사되는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불안해서 문을 잘 잠그고 나왔었나, 같은 시시한 말을 주고받아야 할 것 같았다.
“안전하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
나는 ‘안전하게’라고 말했다. 아무렇게나 잠들고 일어나고,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불쑥 산이나 물로 들어갈 거라고 그러나 안전하게 사랑할 거라고 했다. 사랑이 삶의 전부였고, 사랑하는 삶만이 의미 있는 삶이었고, 사랑하면서도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 버린 후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는 다음 생을 살고 싶은 사람처럼 그랬다. 그렇게 사랑에 매달려 왔다. 그 매달림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 기다려진다는 말, 보고 싶었다는 말… 이런 말들이 모인 안전한 세계가 있어 그곳에 나의 불안까지 의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건 너의 결핍이야.”
L의 목소리에는 어떤 엄격함이 배어있었다. 학사 4년, 석사 2년, 박사 6년… 문제를 찾아내는데 유능한 L에게 나의 사랑은 잘못된 풀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학생 같았을까. 삶의 크고 작은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확률과 수식으로 답을 구하는 그에게 결핍은 해결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해?”
얼음 잔을 만지는 L의 까맣고 긴 손가락이 서늘했다. 어느 날 L이 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작은 의구심도 생겨났다. L은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곳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무너져 있고 크고 작은 구멍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L은 결핍이 사랑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핍이 드러나는 순간 서둘러 도망치거나 포기해 버리는 나는 해결의 의미가 없어진 사람이었다.
“글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내 결핍이 사라지지는 않아. 하지만 언제인가 내가 너의 결핍을 발견하게 됐을 때, 나는 그걸 모르는 척할 거야."
내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L은 막힘없는 해설을 할 것이다. 글렌 굴드가 1955년에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만 듣는 나에게 다른 버전을 설명해 주겠지. 또 내가 책 속에서 문장을 찾으면 그건 내 눈에 들어온 빛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L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 그러므로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은 서로를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것. L의 지난 연애가 모두 석 달을 넘지 못했다는 걸 내가 알았을 때, 비바람이 불면 밤낮 없이 웅크리는 나를 L이 알았을 때, 우리가 서로의 결핍을 알았을 때 내려놓지 않고, 등 돌리지 않고, 모르는 척했더라면. 그랬다면 네 말이 덜 아플까.
L과 나는 테트라포드 위로 올라가 바람을 맞았다. 바닷바람의 습기에 옷 속에 갇혀버린 땀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이 간지러운 감정은 어떻게 사랑이 되나? 사랑은 어디서부터 안전해지나? 안전이 지금보다 덜 나쁜 게 맞나? 사랑하려 애쓰는 삶이라는 것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모래사장에 내려설 때처럼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섰다. 우둘투둘한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은 모래를 밟는 그것과는 달랐다. 점점 빠져드는 무력감이 아닌 나라는 몸을 지고 있는 효능감. 나는 결핍에게 그런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결핍을 ‘없음’이 아닌 ‘자유’로 느끼고 자유로운 사랑을 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그 힘은 내게 무언가를 덧대는 것이 아니라 맨몸을 허락하는 시도에서 나왔다. 그 이유를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온전한 주체는 자신의 부족함을 결핍이 아닌 자유로 느끼고, 자유롭게 타자를 향해서 나아간다. 그것이 곧 사랑이다.’☾
“우리가 어떻든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발에 신발을 신겨주며 L이 말했다. 그 순간 그의 구부린 등 뒤로 불빛이 쏟아졌다. 작고 환하고 설명하기 어렵고 끝 모르는 반짝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불안해서 나는 시시한 말을 하고 싶어졌다. 단단히 묶인 신발 끈 같은, 툭- 풀리는 신발 끈 같은 그런 말을.
“세계가 안전해진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