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를 알게 된 후 나는 말에 관해 자주 생각했다. W는 한국어를 못하는 캐나다 사람이고 나는 영어를 못하는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대화했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면 그가 끄덕거리고, 그가 영어로 질문하면 나는 한국어로 대답하는 식이었다. 부정확한 발음과 더듬거리는 단어들을 꿰어가면서 우주의 모든 이야기를 했다. 비포 선셋☾의 셀린과 제시처럼.
너는 재즈를 좋아하니? 너는 무슨 차를 마시니? 너는 어디에서 책을 읽니? Do You~?의 다카포. 자기를 설명하는 말 보다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반복해서 듣고 싶어 한다면 세상에 ‘지루함’이란 단어는 무용해지고 아름다운 연주가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를 전시하려고만 하지 타인의 깊은 내면에는 별 흥미가 없다. 때때로 나는 같은 언어로 얘기하면서도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기분, 풀지 못한 문제를 다시 풀어야 하는 기분, 작별 인사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어딘가 아픈 기분이 들었다.
셀린(Celine) : 만약 오늘 밤, 우리 둘 다 죽을 운명이라면. 그럼 우린 네 책이나 환경에 대해서 얘기할까?
제시(Jesse) :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셀린(Celine) : 내 말은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거야.
W와 다시 만난 것은 서울의 어느 카페였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별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대화를 나눴다. W는 부산으로 휴가를 다녀온 근황ㅡ그곳에서 만난 여자가 얼마나 특별했는지ㅡ을 말했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고 자기 일에도 열정적이었지만 서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이 달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별의 이유를 듣게 될 때면 언제나 그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잘라도 계속 자라나는 머리카락이라면, 누군가와 이별하는 일은 집안의 어디에나 머리카락이 있는 것이다. 결국 같은 뿌리를 가져서 잡아당기면 아플 뿐이었다.
W는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는데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커피 바에서 따듯한 물 한 잔을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내가 W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고 해서 W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슬픔은 사랑만큼이나 사적이고 개별적이어서 세상에 똑같은 슬픔은 없으므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너의 고통은 타당하다고 조용히 곁에 있어 줄 수는 있었다.
셀린(Celine) : 아픔이 없다면 추억이 아름다울 텐데.
제시(Jesse) : 살아 있는 한 추억은 계속 변하지.
“말하자면 눈빛이야. 예쁜 눈이 아니라 내면이 비치는 눈.”
사람을 만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냐고 W가 물었다. 이미 아는 말이 우리에게 언어의 의미를 곱씹기보다 내용을 일컫는 평범성이라면, 눈으로 하는 말은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든 마음이 비치는 진실성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의 눈을 호수라고 생각해 왔다. 눈은 셀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잔잔해 보이는데 언뜻 비치는 빛에 투명하게 자기가 드러난다. 주관적인 믿음이었지만 나는 늘 거울에 비친 내 눈을 응시하며 일상의 물살로부터 고유한 빛을 잃지 않았는지 점검하곤 했다. 함께 일하게 될 사람의 눈빛을 살피거나 연인의 눈동자 색을 기억하는 건 습관이 되었다.
“내가 가장 슬펐을 때. 그러니까 커피를 마시다가, 장을 보다가, 계단을 오르다가도 울음이 터져 나왔을 때 물속에 있는 기분이었거든. 깊은 물 속은 사방이 어둠이었지만 빛이 하나둘씩 켜질 때가 있었어.”
그 빛은 슬픔을 변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눈빛이었다. 슬픔을 서둘러 없애려는 것보다 돌보는 것에 가깝고, 고치려는 시도가 아닌 곁에 있는 연대였다. 나는 삶과 돌봄, 삶과 연대 사이를 쉼 없이 오고 갔다. 그 사이 어디에선가 빛나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하며 자꾸만 가라앉는 삶을 붙잡았다.
“네 눈이 레이크 루이스 같더라도 중요한 건 사람 때문에 멸망하지 않는 거야.”
셀린(Celine) : 네 책이 알려줬지. 내가 예전에 얼마나 로맨틱했는지, 사랑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지금은 사랑 같은 건 더 이상 믿지 않아.
우리는 카페를 나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걸었다. 빛이 있고 별이 없는 서울의 밤. 아름답고 서늘한 오거리의 야경을 보며 나는 추운 듯 몸을 떨었다. 외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옅은 커피 냄새가 났다.
“갈수록 사랑이 어려워. 그렇지 않니?”
“Love is easy.”
W의 어깨에 단정히 감겨있던 머플러가 조금 들썩였다.
“그래, 사랑은 쉬운 일이네. 사람이 끔찍하게 어려운 거지.”
11월을 지나는 바람이 자꾸만 등을 밀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매연과 퇴근길 자동차의 경적, 버스 손잡이를 따라 흔들리는 사람들 속에서 슬픔은 허공 같고 사랑은 너무 먼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