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열었다. 틀낭☾에서 틀낭으로 산새가 저공비행을 했다.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빛나는 붉은 열매, 들개가 낙엽을 밝는 소리, 비에 젖은 흙냄새가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를 장악했다. 하늘은 돌아가기엔 멀고 머무르기엔 아득한 블루였다. 모든 게 멀어지지만 또렷해 보이는 걸 나는 가을이라고 불렀다.
가을이 되면 내 입술에 붙어사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이건 갈대야? 억새야?”
숲에서 표류하게 되면 나는 먹는 풀 못 먹는 풀 구분 못하고 죽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갈대는 물가를 좋아하고, 억새는 산릉선을 좋아해.”
얼마 전 함덕에 사는 B가 명쾌한 대답을 해주었다. 덕분에 얼마 전보다는 조금 나은 섬사람이 된 것 같다. 이제 누군가에게 으레 아는 척을 할 때마다 B가 생각나겠지. 나는 김애란의 소설 속 문장을 떠올렸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 버리는 것 같아요.☾
세상에는 그런 이름들이 있다. 데미안을 선물해 준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 새 학기 점심 방송에 희재를 틀던 방송반 선배, 주방세제 맛 고수를 접시에 덜어준 상사처럼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 있는 이름들. 나는 돌담 너머 빈터에 잡초처럼 자란 억새를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풍경에는 당신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다고. 억새가 흔들리는 풍경에는 언제나 한 장면이 달라붙어 있었다.
< 억새 숲 한 가운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휘어지게 웃고 있는 내가 있다. 한 손은 주머니에, 한쪽 어깨에는 카메라를 매고 구름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뒷모습도.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내가 부를 때 그의 얼굴은 언제나 환하게 구겨졌다. 나는 구겨진 얼굴로 살아온 그를 좋아했다. 치열하게 웃고 아파한 흔적이 고스란한 얼굴은 그가 감성적이고 솔직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깨지는 것을 만지듯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그는 내게 발밑을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걷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세상이 어둑해질 때까지. >
열린 창 안으로 그림자가 쏟아졌다. 모든 게 또렷했지만 검은 것은 더 검게 멀어지고 있었다.
아끈다랑쉬 오름은 다랑쉬 오름 옆에 있다. 평소에는 ‘오름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진 다랑쉬의 겸사겸사 느낌이지만 가을에는 매일이 연휴처럼 북적거린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나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좁고 미끄럽다. 사람들은 앞에 가는 사람의 허리를 밀어주기도, 잘 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보기도 하며 줄줄이 정상을 향해 오른다.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고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오를 즈음 바람이 불고 먼 곳에서인 듯 소리가 들린다.
사각사각.. 스으.. 솨아아아..
억새 사이사이에 핀 풀꽃ㅡ꽃향유, 자주쓴풀, 산국, 개쑥부쟁이ㅡ을 채집하다가 고씨 할머니 무덤가에 다다르면 목을 길게 뺀다. 동그란 분화구를 가득 메운 억새꽃이 넘실거리고 있다. 가는 줄기가 왼쪽으로 휘어지고, 오른쪽으로 되돌아가는가 하면 뒤로 휙 쓰러지면서 리듬을 만든다. 흔들림보다도 흔들림을 어떻게 변주하는지가 중요해 보인다. 재즈처럼. 재즈의 즉흥성은 불안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에 따라 매번 새로운 음악이 태어난다. 똑같은 바람이 두 번 다시 불지 않듯이 똑같은 재즈 연주는 없다. 단 한 번뿐.
사각사각.. 스으.. 솨아아아..
오래된 장면이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들판으로 달려가다 돌아서 두 팔을 펼치는 모습. 제 코에 풀을 갖다 대고 귀 옆에 꽂는 모습. 그러다 웃음소리를 내며 가늘어진 눈가로 주름이 깊어지는 모습… 아름다운 풍경에는 여전히 당신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나는 어떤 음악을 한 곡 끝낸 것도 같다.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인지 그마저도 끝나는 동시에 사라진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재즈 같은 일이겠지. 나는 내 흔들리는 마음 어딘가에 납작 엎드렸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숲을 걸어 나갈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를 흥얼거리면서.
다랑쉬 오름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이 하늘에 바짝 붙어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은 단 한 번뿐인 블루였다. |